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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인터뷰

“어음쓰지 않고 할부도 없는 건강한 전문건설기업, 우리나라 미장분야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

광복산업(주) 남상술 대표

한국주택공사(LH)지난 5월 11일 진주 본사에서 ‘2020년도 우수업체 시상식’을 시상했다. 이 행사는 현장 관리 및 시공품질 우수업체와 품질향상에 기여한 우수기업을 시상하는 자리이다. 이날 미장 부분에서는 광복산업(주) 남상술 대표가 선정됐다. 국내 미장 관련 업체가 무려 2,700여 개가 넘었다는 점에서 남 대표의 수상은 그에게 매우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미장은 사람으로 치면 화장에 해당하는 일이다. 건물은 튼튼한 구조물이 되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겉으로 보이는 미장 부분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지난 46년간 미장 부분에서 외길을 걸어온 남상술 대표를 만났다.

 

일용직 노동자로 사회생활 시작
광복산업이 설립된 것은 지난 2002년. 그간 동종 업계에서 일해왔던 그는 독립을 선택했다. 그가 다녔던 회사 이름이 광복건설. 막상 이름을 지으려고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고 자신이 청춘을 바쳤던 회사인지라 사명인 ‘광복’을 따와 광복산업으로 이름 지었다. 사실 업계에서는 미장을 ‘인건비 공사’라고 부른다. 정확한 용어는 아니지만, 인건비 중심의 사업 구조이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보니 경쟁이 매우 치열하고 도산하는 업체도 부지기수다. 남 대표의 말에 따르면 창업 회사 중 살아남는 회사는 5%에 불과하고 나머지 95%의 회사는 2~3년 안에 망한다고 한다. 그만큼 생존이 힘들고 척박한 시장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광복산업의 지난 18년은 이러한 열악한 환경과의 끊임없는 생존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LH로부터 상을 받으니 지난 세월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습니다. 고생하며 이 일을 배우고, 사업을 운영했지만, 크게 부도를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믿고 따라와 준 직원들과 현장 관리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일용직 여러분들에게도 정말로 감사합니다. 우리 회사가 설립될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는 일용직 노동자분도 있을 정도입니다. LH로부터 광복산업의 품질과 공정, 안전사고와 관련한 완벽한 인정을 받은 것 같아 무척 기쁩니다. 앞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지 않고 꾸준하게 미장의 한길을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미장이라는 전문 건설업계로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퍼스트레이디였던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다음 해부터 그는 이쪽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남상술 대표의 삶에는 한국 근대화의 고단했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전쟁 직후의 세대였던 그는 고향인 전북 부안에서 할 일이라곤 ‘지게 일’ 밖에 없었다. 늘 배가 고픈 경험을 해야 했고, 밥이 없어 물로만 끼니를 때우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구나 8남매 중 3째였던 그는 형제들에 대한 책임감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을 선택했다.
“어차피 고향에서 지게 일을 하나, 서울에서 힘든 일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왕이면 사람이 많은 서울에서 하는 것이 좀 더 기회가 많겠다 싶었죠. 그렇게 해서 서울로 올라와 미장일을 하는 일용직 노동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밥도 공사 현장에서 책임져주지 않아 돈을 받아 제 손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일이 없어 또 실직자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너무 일을 많이 해서 밤에 잘 때 코피가 나는 것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일하다 광복건설에 정식 직원으로 들어가게 됐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미장일을 전문적으로 했습니다. 그나마 경제적인 여유가 조금 생겨 동생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고, 동생들은 공무원이 되었으며, 교사로 잘 생활하고 있습니다.”


까다롭던 미국인도 인정했던 빨간벽돌 조적실력
창업을 했던 2002년 전까지 그는 미장일을 하면서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그는 서초동 성당, 중앙대학교 국제대학원, 덕성여대 기숙사 건설에 참여했던 것이 큰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당시 미국 건설사들이 함께 참여하면서 검측을 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조적 실력이 많은 이들의 인정을 받았다. 조적은 건물 외형을 빨간벽돌로 할 경우 벽돌을 쌓는 일을 말한다. 그 자체로 인테리어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유럽에서 조적공은 예술가 대접을 받는 정도다. 
“미국인들이 검측을 할 때 저의 조적 실력을 보고서 ‘Good’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벽돌을 쌓으면 그 까다로운 미국인들이 아예 검측도 하지 않을 정도였죠. 이후 제가 다니던 회사에서 공사를 수주할 때면 제가 미장일을 한다는 조건으로 일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저도 창업을 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꺼내면 사장님이 집에 와서 3일 동안 집에를 가지 않고 말릴 정도였습니다. 이사를 한다고 하면 2,000만원, 3,000만원도 주고, 보너스도 400%씩 받곤 했습니다.”
그렇게 탄탄한 실력을 가진 남 대표였기에 창업의 초기 시절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일도 많았고, 지금처럼 치열한 단가 경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조그만 영세업체에서 욕심을 부려 어음을 발행하거나 많은 일을 맡게 되면 자칫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일당을 절대 미루지 않고 철저하게 신용을 지켰다. 그 자신 역시 배고픈 과거의 시절은 견뎌왔기 때문에 삶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사업을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월급지급을 미뤄본 적이 없다. 이러한 철저한 신용 덕분일까. 그가 6년 전 부도를 맞아 큰 어려움을 처했을 때도 노동자들은 그의 신뢰에 보답했다.
“자재가격만 3억 5천이었던 큰 공사였는데 결국 원청업체는 부도나 났고 저희 광복산업도 고스란히 피해를 봤습니다. 하지만 그간 벌었던 돈을 그저 고스란히 은행에만 넣어 놓았던 저로서는 그나마 피해를 복구할 여력이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일당 지급을 보름만 미뤄달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한 달도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해주어 무척 고마웠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현금 위주로 경영을 한다. 회사 차를 살 때에는 할부로도 사지 않는다. 20년간 거래한 기업에서 제발 어음을 쓰라고 해도 절대로 쓰지 않는다. 자칫 영세한 업체에서 어음을 남발하고 할부금이 있으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기에 대응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업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하면 제 눈에는 피눈물이 나는 법입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양심적인 기업으로 남고 싶습니다.”
연매출 80억 원에 직원 3명의 작은 회사. 하지만 광복산업의 윤리경영은 수천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재벌 못지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용직 노동자도 힘은 세월을 견뎌 나가야 하는 지금의 상황. 그나마 광복산업 남상술 대표와 같은 사람이 있기에, 오늘도 대한민국 건설현장은 힘차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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