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의미는 '음양의 합이 새로운 에너지로 펼쳐지는 섭리의 근본'이라 합니다. 태초라는 시간의 시작으로 부터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삶의 여정 안에서-시간은; 사랑의 에너지를 채워감으로 현재의 존재감과 미래를 향한 원동력을 준비합니다. 즉 시간은 사랑이고, 에너지로-끊임없이 꾸준하게 움직이는 그대의 생명이요. 힘입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지금 시간 위에 그대가 서 있습니다. 시간은 그대의 삶의 터전입니다. -한판고륜- 우리는 '처음 혹은 태초'라 불리우는 시간의 시작으로 '지금 혹은 현재'라 하는 시간이라는 공간을 여행합니다. 부모님과 조상으로 이어오는 유전자를 통하여, 수많은 선지자들의 지식과 지혜를 통하여 그리고 자연과 모든 삶의 상식을 통하여 과거의 시간을 여행하고, 현재의 시간을 꾸며 갑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지금도 시간은 흘러가며 채워지고 있으며, 우리가 가지는 삶의 시간은 소진되어 가는 것입니다. 시간은 삶 자체이며, 이 글을 읽는 그대의 귀중한 시간 입니다, 누구도 그대의 시간은 뺏지 못 합니다. 시간은 새롭고 미래를 구성해가는 근본 에너지입니다, 그대가 갖는 모든 에너지가 모든 삶에 작용하고 그대에게 할당된 시간은 오늘도 그대와 함께 온
코리올라누스 (Coriolanus, NT Live, 2014) 감독 조지 루크 출연 톰 히들스턴, 마크 게티스, 데보라 핀들리 등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이 출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다만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요즈음 떠들썩한 미투 운동에 공감과 분노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이 아픈 양가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기쁘게 관람한 작품들을 창작했던 사람들이 무대 뒤에서 일으킨 범죄를 생각하면 분노가 생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힘든 연극계가 이들 때문에 더 어려워질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우리나라 연극계는 문화의 사각지대라 할 수 있다. 거대 문화 산업들이 대부분의 수요를 가져가면 이 잔혹한 제로 섬 게임에 굶주리는 것은 연극인들이다. 그럼에도 연극을 사랑하는 이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연극이 주는 매력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극장 연극이 그렇다. 5년 전쯤 런던에서 <코리올라누스>를 봤다. 총 5막으로 구성, 166분을 내리 달리는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이었다. 이 정도 역사극이라면 으레 커다란 무대와 웅장한 세트, 정교한 소품이 동반된 공연을 떠올린다. 그러나 내가 들어선 공연장은 런던 코벤트 가든의 소극장 D
"나~~~~두" 합시다. 참 요즘은 미.투 라는 말이 무성한가 보다. 나에게 '선생님! 미 투가 뭐대유....'하고 질문하는 노인들, 그리고 미.투 라는 소리가 뉴-스는 물론 모이는 곳 마다 나오는 소리다. 요즘은 처음 보다 조금 걱정어린 소리가 되어버린 이 말을 설명해 본다. "me, too" >> 우리 말로 "나 또한, 혹은 나 역시"라는 뜻이 맞을 것이다. 무엇이? me, too........????? 조용히 입을 열어 들리는 소리를 그대로 풀이 해 본디. 미인들의 투정, 아니면 미인들의 투쟁, ............어린이들도 그리고 나이가 많으신 분들에게 '미인들의 투쟁-미인들의 투정'으로 이야기해야 맞는 것일까? 요즘에 너무나 부정적이고 불신하는 사회적 갈등이 우리 자신들을 부정적으로 몰아가고 있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든다. 미투 즉 우리 말로 '나도'라는 말을 미투 아닌 우리 말로 '나두'로 하여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나~두 운동을 권하고 싶다. 예를 들면, 좋은 아침 ! 나~두, 예쁜 사람 ! 나~두, 함께 하자 ! 나~두, 사랑해! 나~두, 공부해! 나~두, 같이 할래! 나~두,.........나두는 스스로 마음을 합해가는
코소보편 동유럽의 이슬람국가 코소보의 프리젠(Prizen) 오후 4시 코소보 행 버스 편에 올랐다. 스코피아의 뒷골목과 시장터를 구경한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4시 40분 코소보 국경지대에 도착하니 차량이 많이 몰려있다. 차창밖에 무슬림 모스크도 간간히 나타난다. 버스가 1시간 이상 첩첩히 쌓인 산허리를 돌았다. 마치 강원도의 어느 산골짜기를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산야엔 흰색과 노란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슈와렉까시를 지나 프리젠시에 도착하여 프리젠니호텔에 알렌과 둘이서 방을 하나 구했다. 오랜만에 알렌과 편안히 하루 밤을 보내고 호텔에서 제공하는 빵과 계란 튀김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짐을 호텔 카운터에 맡기고 알렌과 도시 구경을 나왔다. 거리의 골목길을 정처 없이 걷다가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플라타나스가 우거진 식당 앞 천막 카페에서 케밥과 샐러드를 곁들여 점심을 먹었다. 질척거리는 도로 한 켠에서 학창시절 귀에 익었던 엘콘돌 파사의 노래 가락이 흘러나와 마음을 흔들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따끈한 차 한 잔이 실핏줄을 따라 온몸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프리젠은 코소보에서 두세 번째 가는 도시지만 우리나라의 작은 시골 도시를 연상하면 된다. 도시 곳
외할머니를 둔 모든 이들에게 -영화 ‘할머니의 먼 집’ 다큐멘터리. 한국. 92분. 2016. 감독 이소현. 출연 이소현 박삼순. 모임 플랫폼 문토를 통해 가입한 다큐 모임 ‘다큐로 묻는 밤’의 첫 모임 날이었다. 회사일로 바쁘다는 핑례로 리더인 이승문 PD의 ‘5월, 아이들’ 레퍼런스를 보지 않고 참석했다. 첫 모임의 주제는 죽음이었고 그래서 레퍼런스도 감상 영화도 죽음을 다룬 작품이었다. ‘할머니의 먼 집’은 놀랍도록 사적인 이야기를 기록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죽음의 목전에 닿아있는 자신의 할머니를 감독이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영화의 모티브다. 영화는 할머니의 자살 시도로 시작된다. 주인공 박삼순 할머니는 너무 오래 살았고, 조금이라도 빨리 배우자 곁으로 가는 것이 자식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 깔끔하게 인생을 정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흔 세 살의 주인공은 대장암으로 투병 중이신 내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외할머니는 좀처럼 가족 생각을 잘 하지 않는 내게도 각별한 분이었다. 서울에서 투병 중이실 때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찾아뵙곤 했다. 생명이 스러져가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병든 사람에게 ‘금방 나았으면 좋
인류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는 1972년 초 로마클럽이 펴낸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라는 보고서다. 무려 9억 부 넘게 팔렸다는 이 보고서는 세계 인구의 팽창, 공업화, 자원고갈이 계속된다면 경제성장은 한 세기 안에 한계에 도달하고 전 세계는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해 6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스톡홀름회의)는 ‘인간환경선언’을 채택해 지구의 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사회의 협력 가능성을 열었다. 현대 환경주의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스톡홀름 회의는 환경에 대한 관심과 개발, 성장, 고용과 같은 경제적 개념 사이의 긍정적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개념이 처음으로 태동한 것이다. 1987년 노르웨이 총리가 의장을 맡은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는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노르웨이 총리의 이름을 따서 <브룬트란트 보고서>라고도 불리는 이 보고서 발간을 계기로, 훗날 환경 관련 논의의 핵심이 된 ‘지속가능발전
어린 시절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심부름 왕’이었다. 형도, 동생도 여럿 있었지만 어머니건 할아버지건 우리 가족은 궂은일만 있으면 주로 내게 맡겼다. 구시렁대지 않고 고분고분 심부름을 하니 모두들 나를 시키는 게 편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하면 “형들은 다 컸고 동생들은 아직 어리니까 너를 시킨다”며 나를 어르셨지만 난 심부름을 독차지하는 게 기쁨이었다. 심부름은 참으로 다양했다. 그 중 하나는 닭을 잡는 일이었다. 주말에 할아버지 댁에 가면끼니때마다 닭을 고아 주셨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닭 잡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꼬꼬댁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닭을 잡아 목을 비틀고 털을 뽑은 뒤 내장을 훑어 소금으로 버무린 뒤모이주머니까지 삶아 식탁에 올리는 초등학생으로는 쉽지 않았지만, 할아버지 댁에서는 나의 일과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은행 심부름을 언제나 내게만 맡겼고, 그 일은 학년이 바뀌어도 계속됐다. 낚시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를 위해 미끼용 지렁이를 잡는 것도 내 몫이었다. 어머니의 심부름은 더 많았다. 당시에는 계원 10명을 모으면 계주는 공짜로 계를 타는 이른바 ‘물품계’가 인기였는데 어머니는 살림에 보태려고 자주 계원들을 모
많은 사람들은 영웅호걸을 좋아한다. 특히 난세에서는 영웅호걸이 나타나서 이 시대를 이끌어 주길 기대한다.종교인들 또한 이 시대를 구원해 줄 메시아의 탄생을 기원한다.그런데 우리는 지금 눈앞에 영웅호걸이나 메시아가 나타나도 알아볼 수가 없다.왜냐하면 본적도 없고 그 판단할 기준도 모르기 때문이다.적어도 역사속에서 말하는 영웅호걸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영웅호걸은 기준에 따라서 준걸(俊傑), 호걸(豪傑), 걸인(傑人)으로 나눈다.준걸은, 덕(德)이 있어서 은혜를 베풀 줄 알고, 포용력이 있어서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도 끌어 안을 줄 알고, 信(신, 믿음)이 있어서 남에게 먼저 믿음을 줄 수 있고, 義(의, 의리)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고, 재주가 있어서 옛걸을 배우고 거울삼을 줄 알아서 선견지명이 있고, 지혜가 밝아서 아래 사람들을 잘 살필 줄 알아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된다. 이런 사람을 준재(俊才)라 한다. 호걸은, 세상의 사표(師表)가 될수 있는 행동을 하고, 잘잘못이나 의혹을 판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고, 사소한약속이라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신념이 있고, 재물이 생기면 남과 나누어 가질수 있을 정도로 사심이 없고 청
하루 24시간 중, 우리와 가장 많이 눈을 마주치는 것은 무엇일까? 도심 속 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약속장소를 향할 때,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릴 때, 우리의 눈은 스마트폰을 향한다. 스마트폰이 등장한지 10여년 만에 이러한 모습은 일상적인 모습이 됐다.우 리가 소식을 전할 때 처음에는 인편으로 다음에는 마차 등 운송수단을 이용했다. 이 시절 소식을 전하려면 수일에서 수십일이 걸렸다.1876년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발명하고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하게 됐다.그 리고 전화기는 휴대전화로 스마트폰으로 진화해 이제는 단순히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처리와 휴식 그리고 오락을 즐길 수 있도록 발전했다. 이렇듯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기술적 편의와 물질적 풍요를 선물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과 함께 ‘새것(전화)’은 ‘옛것(우편)’이 되고,그 자리는 ‘더 새로운 것(스마트폰)’이채우고 있으며,이러한 기술발전과 경제성장은 더 많은 자원을 요구하고 더 많은 재화와 폐기물을 발생시킨다. 세계자원연구소(WRI)는 2030년에는 2009년에 대비해 중산층이 30억명 증가해 전 세계적으로 자원부족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90% 이
정답은 무엇인가? 공자의 제자 두 명이 군수가 되었다. 공자는 기쁜 마음으로 제자들을 찾아가 만나보았다. 제자들에게 공자는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느냐고 물었다. 우선 자천(子賤)이라는 제자는 이렇게 답을 했다. “유학을 펼쳐 날로 밝아졌으니 얻은 것(一得)이요, 돈을 벌어 친척들에게 베풀고 가까워졌으니 또 하나 얻은 것(二得)이 요, 친구들에게 베풀 수 있어 붕우가 많아졌으니 세 번 째 얻은 것(三得)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멸(孔 蔑)이라는 제자는 “시간이 없어 공부를 못했으니 첫 번 째 잃음(一亡)이요, 정사에 바빠 친척과 날로 멀어졌으니 또 하나 잃은 것(二亡)이요, 같은 이유로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으니 세 번째 잃은 것(三亡)입니다.”라고 하였다. 같은 일을 맡아서 행함에 이와 같이 정반대의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자는 얻은 것이 많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자는 잃은 것이 많다고 한다. 동일한 일을 두고 각자의 생각에 따라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 공자의 개인주의 교수법은 이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 보통 사람은 인에 대한 정의를 내리 하면 하나로 마무리하겠지만 공자의 경우는 다르다. 그러나 그 답이 틀린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