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감염예방국민협의회 오길록 총재
일평생 불의를 배격하고 평생정의를 실천한 투사(鬪士), 이제는 감염병에 맞서다

6월 22일 오후 5시, 한국감염예방국민협의회(한감협)와 비채나, 데일리뉴스가 공동 업무협약(MOU) 체결식을 갖기로 한 토다이 반포점은 그 커다란 공간에 비해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오길록 한감협 총재를 인터뷰하고자 2시간 일찍 방문한 인터뷰어 입장에서는 코로나 감염에 대한 우려를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처음 대면한 오길록 총재는 인자한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5공 전두환 통치시대에 민주화 투쟁의 역군으로서, 또 이후 여러 정권을 거치는 동안 부패한 정권에 대한 폭로와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투사로서 기대했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그의 확고한 신념과 비전은 곧 팔순을 앞둔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열망을 품고 있었다.

▲ 한감협, 비채나, 데일리뉴스 업무협약식(사진=유미라 기자)
▲ 한감협, 비채나, 데일리뉴스 업무협약식(사진=유미라 기자)

이미 2년 전 팬데믹을 예견⋯ 코로나는 앞으로 닥칠 더 큰 전염병을 위한 준비

공식적으로 한감협이 설립된 것은 코로나 발발 이후인 지난해 9월이지만, 그 태동은 이미 2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2019년의 어느 날, 오 총재를 비롯해 각계에 적을 두고 있던 전문가들이 친목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2003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이 유행했던 걸 이미 목격한 바, 향후 전 세계에 심대한 타격을 줄 전염병이 닥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찌감치 감염병의 예방 및 치료에 관한 연구와 토론, 발표를 진행키로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모임은 지난 2년 동안 이어졌고, 참가 인원들 역시 점차 확대돼왔다. 그러나 코로나19라는 대적(大敵)을 상대하기에 그들은 아직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질 않았다.

 코로나의 기세는 무서웠다. 급격한 속도로 전 세계에 창궐한 코로나는 수천만 명이 넘는 확진자와 수백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고, 이는 1년 반이 지난 오늘날까지 현재 진행 중이다. 평소에도 사회 정의와 공헌에 늘 관심을 두고 있던 오 총재는 2020년 9월 1일, 그동안 모임을 해온 이들과 뜻을 모아 ‘한국감염예방국민협의회’를 창립했다. 훨씬 더 조직화되고 짜임새 있게 가동되는 체제가 절실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상황이었던지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창립식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해 저명인사 여럿이 참석했다.

 한감협은 현재 비영리 임의단체로서 아직 법인격을 갖추지 못했기에 법적‧사회적 보호를 기대할 수 없다. 사단법인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1년 이상의 활동 실적이 있어야 하는데, 창립 1주년이 아직 안 된 한감협의 경우 오는 9월에 사단법인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고 그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한감협은 이미 전염병 및 감염관리에 대한 계몽 활동을 펼치고 있고, 정부를 상대로도 감염관리 자격시험을 확립하도록 추진 중이다. 보건복지부의 지원을 받아 주기적으로 포럼도 개최할 예정이다. 여기에 사단법인으로의 전환까지 이뤄지면 전국의 시군구에 지부를 둬서 조직을 본격적으로 확장할 길이 넓어진다. 오 총재는 한감협이 이권단체가 아닌 순수한 계몽단체임을 강조하며, 국민 건강과 예방에 목적을 둔 한감협의 뜻을 온 국민이 이해하고 적극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코로나 사태는 인간이 환경파괴, 종족전쟁, 핵무기 개발 등으로 지구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봐요. 코로나가 지나가더라도 분명 더 큰 전염력을 가진 전염병이 계속 올 거예요. 한감협은 그때를 위해 늘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오 총재는 현대인들이 누리는 편리함을 위해 지금껏 자연환경에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했음을 날카롭게 꼬집으며 그렇게 말했다.

 

불의에 항거하며 애국을 위해 목숨 바친 ‘핏줄’

오 총재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운 조선의 무장 오극신이 있다. 왜란 당시 오극신은 사재를 털어 의주로 피신한 선조의 임시 처소에 식량을 지원했고, 아들 오계적, 조카 오홍적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왜선 70여 척을 격파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흑석산 전투에 참가해 승리를 이끌었던 이들 셋은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결국 모두 순국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나의 오른팔을 잃었다"고 적으며 그들의 죽음을 크게 애통해 했다. 이들의 공적은 현재 해남 우수영의 명량대첩기념공원(울돌목) 기념비에도 기록되어 있다.

 보다 가까이로는 항일운동, 독립운동을 한 선대들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대부분은 이승만 정권 당시 사회주의자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반역자로 몰려 죽임당한 것은 조부들뿐이 아니었다. 오 총재는 8살에 큰 형과 작은 형이 진도의 무인도 갈매기섬에 끌려가 학살당하는 걸 직접 목격했었다. 이에 항의하던 그의 누나 역시 함께 죽임당했다. ‘갈매기섬 학살사건’이라고도 기록된 이 사건은 공권력에 의한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 학살로서, 6·25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권의 지시하에 이뤄졌다. 오 총재의 남은 가족들도 고통을 받았다. 연좌제가 적용돼 남은 가족들은 인신을 억압받고 직업선택의 자유가 말살됐다. 두 아들과 딸을 한꺼번에 잃은 그의 어머니는 화병을 앓다가 끝내 돌아가셨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오 총재는 어린 시절부터 불법과 억압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확립해 왔다. 한국전쟁 당시 불법 학살됐던 이들의 유가족에게 1992년까지 연좌제를 적용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만행을 뼛속 깊이 체감한 그는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에 혼신을 다했을 뿐 아니라, 폭로와 직언을 통해 군사독재를 타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987년 대선 때는 김대중 비방 책자를 색출하는 등 공직선거법의 부정‧부패를 없애는데 주력했다. 당시 정권에 눈엣가시였던 그는 보안사(국가보안사령부)로부터 수배를 당해 강원도로 피신했는데, 결국 잡혀 용산에 끌려와 전기고문을 당했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허리와 다리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그의 고백은, 정의를 위한 그의 투쟁이 결코 허울뿐인 문객의 외침이 아닌 온몸으로, 또 삶으로 직접 겪어낸 산증인의 외침임을 여실히 깨닫게 했다.

한편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면서 당의 민원실장으로 재직한 오 총재는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힘이 없어 실의에 빠진 서민들의 어려움을 처리해 주는 해결사로서도 활동했다. 또 1997년에는 병무청에 직접 찾아가 당시 대선을 앞둔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과 친족의 병역 의혹을 제기했고, 이 후보가 화성과 보령에 각각 2만 평, 4만 평의 땅 투기를 했다는 사실을 적발하고는 직접 기자들을 버스에 태우고 데려가 폭로시키기도 했다.

 그의 정의감 앞에서는 피아(彼我)가 따로 없었다. 김대중 정부에서 당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그는 김 전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였음에도 김 전 대통령의 아들들이 일탈하자 이것을 제어해야 한다고 직언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뿐 아니라 정권도,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 본인의 업적도 빛이 바랠 수 있다고 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설득했다. 그러나 이런 직언에 김 전 대통령은 분개로 반응했고, 이후 그를 요직에서 내쳤다.

“집권자들이 충언하는 이를 내치고, 아부하는 이들만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때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회상에 잠긴 그의 눈은 충신을 내친 윗사람에 대해 아쉬움과 토사구팽당한 이의 쓸쓸함을 모두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일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금세 또렷한 눈빛으로,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라고 단언했다. 다만, 후배 중에 그런 이가 있다면 자기보다 유하고 융통성 있게 대처하는 것이 본인과 가족을 위해서 편할 거라고 충고해주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갑시다.”

이날 한감협은 비채나, 데일리뉴스와 공동 업무협약을 체결하기로 돼 있었다.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데일리뉴스의 일원으로서 마지막으로 오 총재의 가감 없는 속내와 향후 비전을 듣고 싶었다.

“데일리뉴스가 사심 없이 보도하고 이끌어 주면 우리도 사심 없이 도와드릴 거라 약속합니다. 우리 단체는 절대 이권에 개입하기 위해 만든 단체가 아니에요. 한감협 임원들은 모두 무보수로 일해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봉급을 준다고 해도 받지 않아요. 그만큼 사익이 아닌 공익을 추구하는 우리 의지를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나 역시 지금껏 나보다 어려운 사람, 힘든 사람을 위해 노력했지, 내 개인의 이득을 위해, 또 재산을 모으기 위해 남을 속인 일이 단돈 1원도 없어요. 비록 그동안의 활동으로 몸이 많이 상했지만,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에 작년에 한감협을 설립한 겁니다. 그러니 데일리뉴스도 이런 의기(意氣)를 알아주시고, 멀리 가려면 우리와 함께 갑시다.”

오 총재는 데일리뉴스가 여타 언론사처럼 유행이나 화제만 좇고, 기삿거리가 없는 곳은 외면하는 그런 언론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불의가 숨겨져 있는 곳을 끝까지 파헤쳐 언론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입증하는 신문사가 되길 바란다고, 세상 이면에 도사린 수많은 불의를 주저함 없이 보도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의행(懿行)들을 칭찬하고 격려할 수 있는 신문사가 되길 바란다고 진심으로 기원했다. 

일평생을 사회 정의를 위해 헌신한 이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었기 때문일까. 그의 말을 들을수록 앞으로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더 많은 이들이 모일 것이라고, 그래서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우리의 싸움이 결코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내 안에서도 작지만 견고한 싹을 틔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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